IMF 구제금융 — 국가부도의 날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한다고 발표했고, 12월 3일 정부중앙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와 195억 달러 규모의 대기성차관 협약(이행각서)에 서명하며 IMF 관리체제가 공식 시작됐다. 나라 빚이 1,500억 달러를 넘는데 외환보유액은 40억 달러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후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약 227톤, 350만 명 참여)이 벌어졌고, 정부는 2001년 8월 예정보다 3년 앞당겨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왜 일어났나
1990년대 재벌은 빚으로 몸집을 키웠고 은행은 단기 외채로 이를 받쳤다. 1997년 한보·기아가 무너지고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아시아를 덮치자 외국 자본이 빠져나갔다. 11월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나라가 빚을 갚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정부는 12월 3일 IMF에 195억 달러 구제금융을 받으며 고금리·구조조정·시장 개방을 약속했다.
무엇이 달라졌나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150만을 넘었으며, 금 모으기 운동에 350만 명이 참여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은행이 합병되었으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제도화되었다. 2001년 빚을 다 갚았으나 위기가 만든 고용 불안과 양극화는 남았다. 외환위기 직후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어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관련 인물
세계는 같은 시기
- 아시아 금융위기 (1997~1998)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을 거쳐 그해 겨울 한국까지 덮쳤다. 단기 외채에 의존하던 아시아 신흥국들의 통화가 연쇄적으로 무너졌고, 각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한국의 IMF 사태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이 지역 전체를 휩쓴 위기의 일부였다. 다만 재벌의 과잉 차입과 금융감독 부재라는 한국 내부의 취약성이 위기의 파괴력을 키웠다.
- WTO 출범 — 세계화 시대의 개막 (1995)
1995년 1월 1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결과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체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다. 상품뿐 아니라 서비스·지식재산권까지 포괄하는 다자간 무역 규범이 처음으로 갖춰졌다.
수출 주도로 성장해온 한국에게 WTO 체제는 기회이자 압력이었다. 시장 개방 요구가 농업 등 취약 부문으로 밀려들었고,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구호와 1996년 OECD 가입도 이 흐름 위에 있었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환위기
- 국가기록원 IMF 외환위기 극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