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인물사전100편 중 8편

을지문덕 —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은 승장

612 7월 · 살수(청천강)

해 질 녘 고구려 산성 성벽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수나라 대군을 내려다보는 을지문덕의 옆얼굴.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만든 얼굴.
압록강 언덕의 을지문덕 — 초상이 전하지 않아 상상해 만든 얼굴입니다. 살수대첩 루트와 「세 번의 대첩」 인물열전에 같은 얼굴을 씁니다.AI 재현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

이 사람은 이 사전의 표제 인물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 축에 드는데, 그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 언제 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식이 있었는지, 살수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조차 그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적었다. 12세기 최고의 문장가가 국가의 장서를 동원하고도 이 사람의 내력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름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을지가 성이고 문덕이 이름이라는 견해, 을지가 성이 아니라 관직명이나 존칭이라는 견해, 선비족 계통 위지(尉遲)씨와 연결짓는 견해가 갈린다. 중국 기록에는 다른 한자로 적히기도 한다.

그가 한 일은 짧게

612년 수나라가 백만이 넘는다고 기록된 군대를 일으켰다. 을지문덕은 항복을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적진에 직접 걸어 들어가 그들의 군량 사정을 읽고 왔고,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물러서며 적을 안으로 끌어들였으며, 굶주린 별동대가 돌아설 때 살수에서 앞뒤를 끊었다. 30만 5천 가운데 살아 돌아간 것이 2,700명이었다.

둑을 터뜨려 수공을 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수서에도 없다. 후대에 덧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그가 남긴 것은 넉 줄의 시 한 편이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여수장우중문시」로, 형식은 극찬이고 내용은 이만 돌아가라는 조롱이다.

이 사람의 자세한 이야기는 이 자료실의 「세 번의 대첩」 첫 편에 이미 실려 있다. 여기서는 이 사전이 묻는 것만 남긴다.

왜 이 사람만 이토록 비어 있나

고구려가 멸망한 나라이고 그 기록이 남기 어려웠다는 사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비석이 남았고, 연개소문은 정변과 대당전쟁의 기록이 제법 남았다. 유독 을지문덕만 승리의 규모와 개인의 흔적이 극단적으로 어긋난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이 사전에 실린 고구려 인물 대부분이 같은 증상을 보인다. 괴유도, 마로도, 부분노도, 밀우와 유유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했는지는 남았고 누구였는지는 남지 않았다.

고구려는 자신의 역사서 『유기』와 『신집』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구려 사람들을 알아보기 어려운 이유의 상당 부분이 그 두 책의 부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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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와 참고 자료 2건펼쳐 보기
  • [단행본] 삼국사기 열전 제4 · 을지문덕 (김부식, 1145)
  • [단행본] 수서(隋書) 권4 양제기 하 · 권61 우문술전 (위징 외, 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