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에 맞서다22편 중 22편

영화 〈암살자(들)〉과 1974년 8월 15일 — 무엇이 기록이고 무엇이 틀렸나

1974 8월 15일 ·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이 글은 영화 〈암살자(들)〉이 개봉한 2026년 9월 23일 직후, 9월 29일까지 확인된 기록으로 썼고, 9월 30일 기밀 해제된 미국 외교 전문의 내용을, 10월 1일 흔히 묻는 일곱 가지 질문을 보탰다. 새 기록이나 새 증언이 나오면 고쳐 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은 하나다. 그래서 진짜로는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답하려고 쓴다. 영화를 두둔하려는 글도, 영화를 비난하는 쪽을 두둔하려는 글도 아니다. 이 사건을 두고 지금 오가는 말을 세 칸으로 나눠 놓는다. 모두가 인정하는 기록, 틀린 것으로 확인된 주장,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는다.

1974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경일 행사라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던 중이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경축사를 읽던 오전 10시 20분 무렵, 객석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재일교포 2세 청년 문세광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다 잘못 당겨 자기 허벅지를 쏜 소리였다. 그는 통로로 뛰어나오며 연단을 향해 총을 쏘았다. 박정희는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연단 오른쪽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그날 저녁 숨졌다.

숨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기념식 합창단으로 나온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다. 그는 문세광이 아니라 범인을 향해 쏜 경호원의 총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빠지는 이름이라 여기 먼저 적어 둔다.

문세광은 객석의 한 관객이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현장에서 붙잡혔다.

수사가 내린 결론

특별수사본부의 발표는 이렇다. 문세광은 북한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곧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를 노렸으나 실패했고, 그가 쏜 총탄에 육영수가 맞았다. 권총은 그해 여름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서 훔친 것이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숨겨 김포공항을 통과했다.

문세광은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그해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됐다. 사건에서 처형까지 넉 달이 걸리지 않았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다. 일본 경찰도 문세광의 일본 안 행적을 따로 조사했다. 특별수사반은 그해 12월 25일 수사를 마치고 결과를 오사카 지검에 넘겼다. 이틀 뒤 주일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TOKYO 16855, 2005년 기밀 해제)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일본 경찰이 한국과 같이 본 것도 있다. 문세광은 1973년 9월 무렵 박정희 암살을 마음먹었다. 일본인 지인에게 그 남편의 호적 서류를 받아 여권을 마련했고, 그해 11월 홍콩에 총을 사러 갔다가 실패했다. 이듬해 2월부터 한 달 가까이 도쿄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획을 짰고, 7월 오사카의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쳐 8월 6일 서울로 떠났다. 문세광이 범인이라는 데에는 두 나라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은 배후였다. 일본 경찰은 북한과 조총련, 조총련 간부 김호룡이 관여했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홍콩과 서울을 오가는 데 쓴 적지 않은 돈이 어디서 났는지도 밝히지 못했다. 문세광이 아내에게 돌봐 줄 사람이라고 했다는 「마에다」, 도쿄의 병원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한국인 의사가 누구였는지도 풀리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관여가 없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관여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보고였고, 작은 수사반이 조사를 이어 가기로 했다.

미국대사관은 전문 끝의 논평에서 한국 경찰 보고와 문세광의 「자백」, 서울 법원의 결론을 한쪽에, 결론을 내지 못한 일본 보고를 다른 쪽에 두고 그 사이의 차이가 크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 차이가 일본 안에서 한국 수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를 키우고, 문세광을 서둘러 처형한 것이 증거를 없애려는 것이었다는 믿음도 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에서 그런 의심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구분을 지우고 「미국이 증거 인멸을 의심했다」고 옮기면, 사과 대상을 바꿔 적은 김정일 사과설과 같은 종류의 잘못이 된다.

이 차이는 당시 한일 관계를 크게 흔들었고, 일본 정부가 특사를 보내는 데까지 갔다. 공식 결론은 한국 수사본부의 것이지만, 그 결론이 처음부터 두 나라가 함께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영화는 무엇을 했나

〈암살자(들)〉은 허진호 감독의 극영화다. 문세광을 본뜬 인물의 이름은 문태광이다. 이름부터 바꾼 것은 이 영화가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기록 위에 이야기를 지었다는 표시다.

영화에서는 형사와 기자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총탄 두 발을 쫓고, 중앙정보부가 그 앞을 막아선다. 극 중 인물들이 정권이나 정보기관이 사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또 다른 저격수가 있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끝난다.

제작진은 영화 어디에서도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고, 영화 속 가설을 사실로 내세우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대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역사 왜곡이라며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고, 9월 29일에는 감독과 제작진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됐다. 제목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뜻하는 「암살자(들)」인 것부터가 다른 범인을 암시한다는 이유였다.

틀린 것으로 확인된 주장 — 김정일이 사과했다

논쟁이 커진 것은 9월 28일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영화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썼다. 2002년 박근혜가 방북했을 때 김정일이 육영수 여사 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김정일은 암살 음모는 하급자들이 한 일이고 자신은 미리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미 자기 소행이라고 인정한 사건인데 무슨 다른 배후가 있느냐는 논리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의원은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돌아와 5월 14일 기자회견을 열었고, 김정일이 사과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사과의 대상은 1968년 1·21 사태, 곧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이었다. 그는 뒤에 자서전에서도 김정일이 그 일을 두고 극단주의자들이 잘못 저질렀다며 미안하다고 했다고 적었다. 박근혜 자신이 여러 번 이 사과를 이야기했지만, 늘 1968년의 일이었고 1974년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영수 사건에 대한 사과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나. 일본 지지통신이 2002년 9월 13일에 낸 기사다. 이 기사는 베이징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이 당신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음모에는 하급자들이 관련됐으며 자신은 몰랐다고 했다고 전했다. 장동혁 대표가 쓴 문장과 거의 같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 박근혜 측이 이 내용을 부인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그 뒤로 북한이 이 사건을 두고 사과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고, 박근혜에게서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리하면, 김정일이 육영수 사건을 사과했다는 것은 당사자가 부인한 외신 보도 하나에 기댄 말이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고, 확인된 기록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한 가지를 함께 적어야 공정하다. 북한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북한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과가 있었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과, 수사본부의 결론이 틀렸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다. 앞의 것은 이 글에서 확인했고, 뒤의 것은 이 글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확인되지 않은 가설 — 정권이 배후였다

반대편의 이야기도 같은 잣대로 본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영화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이 물음을 던져 왔다. 대표적인 것이 1989년의 증언이다. 당시 수사본부에서 현장 감식을 맡았던 경찰 감식계장 이건우가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육영수를 쏜 사람은 문세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밖에도 탄두를 끝내 찾지 못했다는 점, 육영수가 쓰러진 방향, 문세광이 어떻게 비표도 없이 식장에 들어왔느냐는 점, 경호실장 박종규의 당시 행동 같은 것이 되풀이해 거론된다.

이 물음들은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물음이 있다는 것과 답이 나왔다는 것은 다르다. 지금까지 정권이나 정보기관이 이 사건을 꾸몄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나 물증, 관련자의 자백은 나온 적이 없다. 그러니 정권 배후설은 반박된 주장이 아니라 증거가 없는 가설이다. 극영화가 가설을 이야기의 재료로 쓰는 것과, 관객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이 정권이 꾸민 일이었다고 믿게 됐다면, 그것은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을 기록처럼 믿게 된 것이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 — 총성과 총탄

영화가 파고든 두 발의 행방은 실제로 논쟁이 이어지는 자리다. 양쪽의 설명을 나란히 놓는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외교사료관에 남은 수사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한다. 현장에서 여섯 번의 총성이 난 것은 맞다. 문세광은 총알 다섯 발을 넣었다. 첫 발은 긴장한 탓에 자기 허벅지에, 둘째는 연설대 왼쪽 위에 맞았고, 셋째는 불발, 넷째가 육영수를 맞혔으며, 다섯째는 문세광이 넘어지면서 나가 태극기에 맞았다. 나머지 한 번의 총성은 단상의 경호원이 객석 쪽으로 쏜 것이다. 그러니 총성 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실이 감춰졌다고 보는 것은 수사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은 그 기록 자체가 당시 수사기관이 만든 것이라는 점, 탄두 일부를 찾지 못했다는 점, 감식 담당자의 뒷날 증언을 든다.

아틀라스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수사 기록은 지금 남은 가장 자세한 기록이다. 다만 그 기록을 만든 쪽과 의심받는 쪽이 같은 정부라는 점 때문에, 독립적인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로 남아 있다. 새 기록이 공개되면 이 칸을 고쳐 쓴다.

영화를 보고 흔히 묻는 일곱 가지

영화가 개봉한 뒤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돈 질문들이 있다. 하나씩 답을 붙인다. 기록으로 답이 있는 것, 기록끼리 엇갈리는 것, 아직 답이 없는 것을 나눠 적는다.

첫째, 감식팀이 갔을 때 중앙정보부가 탄환을 다 치워 놓았다는데 사실인가. 증언은 있다. 감식계장 이건우는 1989년 인터뷰에서 탄흔 네 개는 찾았지만 탄두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기록은 문세광의 다리에 맞은 탄두, 연단과 태극기 쪽 탄두, 장봉화를 맞힌 탄두가 확보됐다고 전한다. 기록끼리 엇갈린다. 누가 치웠는지, 왜 치웠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는 나온 적이 없다. 「치웠다」는 부분은 증언자의 추정이다.

둘째, 문세광의 총은 5연발이고 한 발은 불발인데 총성은 여섯 번이었다. 나머지는 누가 쐈나. 기록상 답이 있다. 경호원이 응사했다. 총성이 몇 번이었는지부터 자료마다 다르다. 수사본부 발표는 일곱 번이고, 여섯 번으로 보는 자료도 있다. 그러나 문세광 말고도 경호원이 쐈다는 데는 양쪽이 다르지 않다. 진짜 쟁점은 경호원이 쐈느냐가 아니라, 육영수를 맞힌 한 발이 누구 총에서 나왔느냐다. 이것은 앞 칸에 적은 대로 풀리지 않았다.

셋째, 박종규 경호실장은 총을 떨어뜨렸다는데, 그럼 경호실에서 누가 쐈고 그 탄은 어디 있나. 기록이 엇갈린다. 박종규는 쏘기 전에 총을 놓쳤고 다른 경호원이 쐈다는 설명이 있고, 박종규와 수행계장 박상범이 쐈다는 설명도 있다. 누가 몇 발을 쐈고 그 탄두가 어디 있는지는 공개된 자료로 정리되지 않았다. 정당한 질문이다.

넷째, 합창단 여고생 장봉화를 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처벌을 받았나. 경호원이 응사한 총탄에 맞았다는 데는 여러 자료가 일치한다. 그런데 이건우는 공소장이 두 사람의 죽음을 모두 문세광의 범행으로 묶었고, 경호원의 응사와 오발은 빠졌다고 주장했다. 쏜 사람의 이름도, 그가 받은 처벌도 공개된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 가장 가볍게 다뤄진 질문이고, 지금도 답이 없다.

다섯째, 비표도 없는 사람이 총을 들고 대통령 앞까지 갔는데 경호실장은 그 뒤에도 승승장구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 비표 없이 들어간 것은 기록된 사실이고, 명백한 경호 실패다. 그러나 경호실장 박종규는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사건 엿새 뒤인 8월 21일까지가 그의 임기였고, 차지철이 뒤를 이었다. 「사건 뒤에도 요직을 맡았다」는 말은 경호실장 자리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

여섯째, 문세광은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 쪽 사람이었고 사격 훈련도 받지 않았다는데, 그런 사람을 조총련이 썼겠나. 소속은 반만 맞다. 문세광은 민단 산하 청년 조직인 한청 쪽이었다. 1972년 민단과 조총련의 친선 모임에 한청 대표로 나갔다가 조총련 간부 김호룡을 만났고, 한국 수사와 재판은 여기서 포섭이 시작됐다고 봤다. 사격 훈련은 문세광 자신이 조총련 시설에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현장 검증에서는 사격장이나 연습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앞에 적은 미국대사관 전문의 「일본 경찰은 관여를 증명하지 못했다」와 같은 맥락이다. 진술은 있고, 뒷받침은 없다.

일곱째, 이 사건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 있다. 문세광이 총을 들고 식장에 들어와 쐈다는 것, 두 사람이 숨졌다는 것, 문세광이 스스로 결심하고 준비했다는 것은 한국 수사도 일본 수사도 같이 봤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다. 육영수를 맞힌 총탄이 누구 것이냐, 그리고 문세광 뒤에 누가 있었느냐. 의혹은 사건 전체가 아니라 이 두 자리에 몰려 있다. 「앞뒤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다 밝혀졌다」는 말도 기록과 맞지 않는다.

무엇이 왜곡인가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사실이 이미 정리된 일을 뒤집으려는 주장을 다뤘다. 이번 편은 조금 다르다. 한쪽 끝에는 확인된 사실이, 다른 쪽 끝에는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 있고, 그 사이에 어느 쪽도 증명하지 못한 질문이 놓여 있다.

그 안에서 분명하게 왜곡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김정일 사과설이다. 사과 대상을 1968년에서 1974년으로 옮기고, 당사자가 부인한 외신 보도를 확정된 사실처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는 근거로 삼았다.

정권 배후설은 왜곡이라기보다 증거가 없는 가설이다. 다만 극영화의 가설이 사실처럼 퍼지는 순간 그것 역시 왜곡이 된다. 그 선을 지키는 몫은 만든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쪽 주장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날 국립극장에서 숨진 사람은 둘이었다. 영부인과 합창단의 여고생이다. 누가 배후였느냐를 두고 다투는 동안에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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